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선다. 노란 꽃이 한껏 피어 있는 길을 지나 부대 근처로 향한다. 아직 휴가 중이지만 오늘은 꼭 부대에 가야 할 일이 있다.
#2
사복을 입고 부대에 들어서니 기분이 묘하다. 사진 촬영이 그나마 가능한 곳에서 사진 한 장 기록. 저 비행기랑 비슷한 군용 수송기를 타야 한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나 스스로 주는 선물은 여행이 제일 적당할 것 같았다. 수송기 탑승을 신청하고 꼭 로또 당첨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는데 이제 막상 여행이 시작된다고 하니 기분이 슬슬 들뜬다.
#3
부대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면회실에서 시간을 때운다. 밖에서 700원 하는 오렌지 주스가 안에서는 340원밖에 안 한다. 싸서 좋다. 한 캔 마셔준다.
삼십여 분을 기다리다가 탑승하는 곳으로 이동했고 탑승장 근처 아는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비행기에 올라탄다.
군용 수송기는 생각보다 아담했지만, 간이 의자 비슷한 곳에 앉아 있긴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이거 아니면 내가 어떻게 대구까지 공짜로 한 시간 만에 갈까.
#4
어색한 느낌으로 대구에 내려서 공항을 걸어 나온다. 어째 실감이 나질 않는다.
#5
사촌누이와 연락을 하면서 철길을 지나 큰길로 나선다. 낯선 분위기의 길거리. 조금은 서울보다 뜨거운 공기. 눈으로, 온몸으로 여행의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다.
#6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 11시쯤 됐을까. 북적대는 학교를 지나 누이를 만나러 간다.
#7
몇 년 만에 보는 누이인지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픈 맘에 당차게 길을 나섰지만, 처음 와보는 곳이라 아무래도 조금 헤매는 기분이다.
#8
아담한 도로들을 지나 지하철역을 찾기 시작했다. 이 근처가 변두리라 그런지 아니면 오전이라 그런지 동네가 조용하다.
#9
드디어 찾은 지하철역. 반갑다. 짜식.
#10
슬슬 걸어 내려가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대구 지하철을 처음 타본다. 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서울에서 쓰는 것과 같은 후불제 교통카드가 다행히 잘 된다. 삑. 하는 소리도 비슷하다.
#11
한가한 지하철역. 누이에게 연락했더니 급하게 움직이고 계신 듯.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12
다른 쪽에서 지하철로 움직이던 누나는 택시를 타고 중앙로로 오신다고 했고, 내가 탄 지하철은 얼마간을 달려 나를 이 역에 떨궈 놓고 갔다. 몇 년 전의 큰 사고 때문에 한동안 이곳 이름을 몇 번이나 들어서 그런지 괜히 익숙한 느낌. 사고의 흔적은 그다지 보이질 않는다.
#13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 우리 누나는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겨준다. 얼마 없는 혈육이지만, 자주 보지도 못하고 뭐했나 싶다. 밥부터 먹자며 회전초밥집으로 들어서서는 신나게 맛나게 댓 접시를 먹었다. 아아. 뿌듯하여라.
밥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시는데 갑자기 큰 고모님께서 호출. 일정을 급하게 잡은 지라 바로 움직일 예정이었지만 어르신께서 부르시니 냉큼 이동.
#14
대구백화점 근처. 희한하게도 대구에는 대구은행, 대구백화점 등이 꽤 규모가 있고 잘 된다. 서울이랑 다른 점을 발견해내고 혼자 신기해한다.
고모님 차를 타고 시지라는 대구 신도시에 있는 고모님 댁으로 갔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그래도 룰루랄라. ^^
#15
다도를 즐기시는 고모님의 차실茶室을 구경하고 과일도 먹고 앉아서 이야기도 한다. 워낙 친척끼리 왕래가 없는 탓에 더 많이 반겨주시니 좋다.
#16
화초를 구경하는데 꽃이 참 곱다.
#17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는 다시 고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선다.
굳이 누이가 바래다주겠다고 따라나선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오랜만에 봤는데도 말이 잘 통한다. 기분이 좋다.
#18
대구역 국군 철도수송사무소. 같이 간 누님의 뒷모습. 잠깐 들어가서 표를 끊는데 공짜가 아니다. 사실 이번 여행은 휴가 군인 무료 수송 체제를 활용한 교통비가 안 드는 여행이었지만, 내가 뭔갈 잘못 안 모양이다.
#19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 앉았다. 대구에서 있는 시간을 너무 짧게 잡았다는 아쉬움이 든다.
#20
기차티켓을 보면 왠지 찍고 싶다.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나는 것처럼 설렌다.
#21
시간이 거의 다 되어 플랫폼에서 철길을 구경한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적한 느낌.
#22
조금씩 걸어 다니며 역 안 풍경과 사람을 구경한다. 아직 볕이 있어서 다행이다.
#23
기차에 올랐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책을 들여다보다가 노래도 좀 듣고 시간이 빨리 흘러 어서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24
부산역 도착. 기억을 거슬러보면 2001년엔가 와보고는 처음인 모양. 여기도 낯설다.
#25
부산역 앞 광장을 나서니 바다 내음이 슬쩍 코에 걸린다. 아 이제 정말 왔구나.
#26
사진을 좀 찍으며 내 기억을 위한 흔적을 남긴다.
#27
사촌 동생과 통화하고 지하철을 탄다. 연산동으로 오란다.
부산 지하철은 서울과 비슷하게 생긴 표를 쓰지만, 더 비싸다. 더군다나 후불제 카드도 안 된다. 치사하다.
#28
연산동 도착. 여기저기서 들리는 사투리에 혼자 즐거워하며 동생이 알려준 출구로 나선다.
#29
어이쿠. 역시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사촌 동생은 많이 변해 있다. 해맑게 웃으며 날 반긴다.
#30
이모와 이모부가 오시기 전에 밥을 먹고 있기로 하고 근처 횟집엘 들어갔다. 역시 바닷가 도시로군. 동네 횟집치고는 꽤 괜찮다.
이모, 이모부도 다 오셔서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며 집으로 들어선다.
#31
사촌 동생 옷으로 갈아입고 컴퓨터 하는 걸 잠깐 구경한다. 나도 잠깐 인터넷에 접속. 어딜 가도 왠지 인터넷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_-; 필시 인터넷 중독일지도 모르겠다.
#32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이모부님께서 보물들을 들고 나오셨다. 오래된 카메라와 필터들, 필름들.
#33
앨범 구경하는 중에 오래된 우리 가족사진을 발견. 전부 이모부께서 찍어 주셨다는 걸 이제사 알게 되니 새삼스럽다. 사진을 너무 반가워하니 몇 장 가져가라고 챙겨주신다.
#34
삼각대를 꺼내서 같이 사진도 찍고 추억들을 나눈다. 역시 사진이란 누군가의 다큐멘터리다.
#35
사촌 동생의 군대사진과 우리 어렸을 적 사진. 밤도 깊었고, 내 기분도 둥둥 떠있는 기분이다. 역시 여행은 즐겁다. 멀리 떨어진 친척들이 참 반갑고 고맙다. 들뜬 맘을 다잡고 내일을 기약하며 잠을 청해본다.
postScript 1년이 넘은 사진이지만 그때 그 좋았던 기억이 슬금슬금 다시 여행 가고 싶게 만드네요. 언제 떠날 수 있을는지. ^^;